2024. 1. 4. 21:45ㆍ에르세르 대륙(完)/별들의 장 (알카이드)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상대가 너무 많았다.
[한멜]
고급스러운 차림새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잭과 아는 사이라니 웬만하면 순순히 보내주려 했다고. 그런데... 감히 실버나이트님의 정보를 캐려 해?
곧바로 그림 소울을 소환해 방어막을 친 나는 반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있는 힘껏 도망쳤다.
[한멜]
놓치지 마라!
나는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끔찍한 추위와 몸의 고통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어서 알카이드에게로 돌아가야 해.
[한멜]
전원 사격 준비!
반란군은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극도의 공포로 숨이 멎는 듯했다. 안 돼,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알카이드, 알카이드...!
[???]
이쪽이에요!
자석에라도 이끌린 것처럼,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그를 알아차리고 반응했다. 이 세상에서 온전히 믿고 나를 맡길 수 있는 단 한 사람. 시위를 떠난 화살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알카이드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새카만 화살비는 허공에 멈춰있었다. 알카이드의 주변엔 온 세상의 별을 끌어모은 듯한 빛 무리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기적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런 모습일까.
[알카이드]
선물이 너무 과하군요. 다시 돌려드리죠.
알카이드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더없이 위협적이었다. 눈앞의 아름다운 기적에 넋이 나가 있던 추격자들은 주춤거렸다.
[알카이드]
하지만, 옛 친구의 동료들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서로 여기까지만 하죠.
한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고 명령했다.
[한멜]
쳇.
그들이 시야에서 전부 사라지자, 알카이드는 그제야 손을 거두었다. 허공에 붙잡혀 있던 화살들이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알카이드]
다치진 않았나요?
[나]
나는 괜찮아요. 알카이드야말로, 그 몸으로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알카이드]
다시 공격해올지도 모릅니다. 어서 가요.
평소처럼 부드러운 태도였지만,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나]
알카이드, 잠깐만요! 조금만 쉬었다가요. 상처도 한번 확인하고...
아니나 다를까, 휘청거리던 알카이드가 눈밭으로 풀썩 쓰러졌다.
[나]
알카이드!
그럼 그렇지. 그는 나를 위해 한계를 넘어서까지 무리한 것이다. 나는 알카이드를 부축했다.
해가 지자 반딧불이같은 빛 무리가 알카이드의 주변에 떠오르더니 다친 그의 몸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그에게 속한 별빛이자 힘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 밝기는 이전보다 현저히 약해져 있었다. 그는 울상을 하고 있는 나를 항해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였다.
[알카이드]
당신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알카이드는 창백한 얼굴로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
응, 맞아요. 속으로 얼마나 불렀는지 몰라요. 떨어져 있으니 걱정되고, 더 보고 싶어서... 계속 다치게만 해서 미안해요.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 봐요. 당신을 끌어들인 게 너무 후회스러위요.
[알카이드]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나 역시 지난 일들이 후회스러외요. 설린의 죽음을 막지 못해서, 당신이 이 세계의 운명을 짊어지도록 방관해서, 그리고... 매번 당신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모두 지난 일들이죠. 나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을 후회 없도록 만들겁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당신뿐이에요. 그러니... 당신이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소원입니다. 당신과 함께하기로 한 건 내 판단이었고 내가 원했던 거예요. 그러니 더는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요.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훔쳐내고서 활짝 웃어 보였다.
[나]
내게도 알카이드뿐이에요. 알죠? 약을 구했어요. 마법은 그만 쓰고 좀 쉬어요. 이제부턴 내가 돌봐줄게요.
[알카이드]
아니에요. 당신까지 굳이 고생할 것 없어요. 빨리 회복하도록 할게요.
[나]
왜요? 혹시 내가 못 미더워서 그래요?
짓궂은 내 말에 알카이드는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
내게도 당신을 보살필 기회를 취요.
우리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나는 그의 눈동자에 오롯이 비친 내 모습을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다. 바람에 날린 내 머리칼이 그의 얼굴에 닿았는지, 그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뜨렸다.
[알카이드]
간지러워요.
-
지하 통로로 자리를 옮기고 알카이드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깊은 상처가 쓸릴 때에도 그는 그저 꾹 참기만 했다.
[나]
아프면 소리 질러요.
[알카이드]
아뇨--
내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알카이드는 그제야 머쓱한 듯 마른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알카이드]
조금... 아프네요.
이상하게도, 그의 피부는 얼음처럼 싸늘했다. 나는 손을 따뜻하게 데운 뒤 그의 두 뺨을 감싸주었다.
[나]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 거예요.
그는 별빛이 담긴 눈동자로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손 위에다 자기 손을 겹쳐 올렸다.
[알카이드]
조금이 아니에요. 너무 따뜻해...
우리는 몸을 딱 붙이고 앉아 아까 챙겨 왔던 비상식량을 꺼내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르록 잠들고 말았다.
-
깨어났을 땐 새벽이었다. 어두운 통로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잠들어 있는 알카이드의 이마를 짚어보니 지나치게 뜨거웠다. 열이 나는 것 같아... 냉찜질을 해줄 물이 필요했다. 나는 그를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일어났다.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자마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레스]
신녀님, 오랜만이야. 그날은 잘도 내게 한 방 먹였겠다?
아끼던 제자와 귀한 제물을 동시에 잃은 대마법사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빨리 찾아낼 줄이야.
[호레스]
제법 오래 기다렸다고. 멍청한 토끼가 굴 밖으로 나오기만을 말이야.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림 소울을 소환하려 했다.
[나]
이 추운 데서 벌벌 떨며 기다리고 있던 주제에 누가 누구더러 멍청하다는 거야?
[호레스]
과연 그럴까?
호레스가 손뼉을 치자 비밀 통로 안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알카이드!
매복이 있었다니! 서둘러 알카이드에게로 돌아가려는데 호레스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호레스]
방금 그 표정 아주 좋았어. 자아, 여흥은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됐고, 나와 함께 가주실까. 예하께서 원하시는 건 너뿐이야. 얌전히 나를 따라오면 저 안에 있는 쓸모없는 녀석의 목숨은 살려주지.
설원 위로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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