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별밤
작은 얼음 나비 몇 마리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얼음 나비를 해치우고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알카이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있었다. 또 자책을 한 걸까.
[알카이드]
얼음 나비 퇴치는 마법사의 소임입니다. 끊임 없이 틈새를 파고드는지라, 계속 순찰을 돌아야 하죠. 물론 놓치는 곳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사상자가 발생하지요.
알카이드는 사람들이 활보하고 있을 중앙광장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알카이드]
신녀님.
[나]
이름 불러주기로 했잖아요.
[알카이드]
저 대신 사람들을 구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나]
수고를 덜어드릴 수 있어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알카이드 님.
우리는 마주 보며 가법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뒤, 성벽을 따라 돌며 하수도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순찰하는 동안 알카이드는 여기저기에 마법을 걸어두었다. 얼음 나비 조사에 필요한 장치라고 했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조사는 그저 핑계일 뿐, 다른 목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나]
아까 그 마법 장치들 말이에요. 조사 차원에서 둔 게 아니죠? 내 흔적을 덮는 것 같던데, 혹시 내가 뭔가 잘못했나요?
나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꼭 붙들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얼른 손을 놓자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카이드]
아무래도 조심해두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런 힘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들기면 안 돼요. 카이로스 예하께는 더더욱.
[나]
대마법사가 알카이드의 스승이라고 했죠? 그래도 괜찮을까요? 알카이드가 곤란해질 덴데요.
알카이드는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나]
당신은 정이 많은 사람이니 더 힘들겠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절대 잊지 말아줘요. 나는 사람들을 지키고 알카이드를 도우려고 여기 온 거예요.
알카이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알카이드]
저는 실상 당신의 감시역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흔들려서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자꾸 하게 되더군요. 제가 곤란해진다 하더라도... 전 괜찮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면 기꺼이 감내하겠습니다.
-
알카이드는 밤마다 숙면을 도울 갖가지 방법들을 가지고 내 방을 찾아왔다. 전에 준 허브티를 마시고 잠에 들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야생 생강즙이나 과일주스같은 따듯한 음료를 가져다 주었따. 그가 나를 위해 담뿍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게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 밤은 어쩐 일인지, 그가 빈손으로 나타났다.
[나]
혹시 나, 더 이상은 쓸모가 없나요? 아니면 죽을 때가 된 거라든지...?
내 짓궂은 목소리에 알카이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카이드]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정말 그랬다면 만찬을 준비했겠지요. 저는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순간 우리 둘 다 조금 당황했다. 그 진지한 알카이드와 농담을 주고받게 되다니!
[나]
정말 많이 변했네요, 알카이드. 마법이라도 걸린 거예요?
[알카이드]
아무리 스승님이라 해도 제게 그런 마법을 걸 수는 없을걸요.
그는 내게 한 걸음 다가서며 다정하게 물었다.
[알카이드]
저와 함께 별을 보러 가시겠습니까?
[나]
네...?
[알카이드]
가벼운 밤산책도 숙면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알카이드는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카이드]
실은... 오늘 골목길에서 우연히 제 동료와 마주쳤습니다. 그들이 내일 아침 무언가를 보고할 거라는 소식을 방금 접했거든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제가 달콤한 꿈의 뒤편으로 숨겨드리겠습니다.
달콤한 꿈이라니? 뭘까? 호기심이 일었다. 다 지우지 못한 마력 파동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가리려는 거겠지.
최근 나는 매일 밖으로 나가 황성을 누비고 다났다. 그러다 보니 그림 소울을 소환하는 일도 잦았다. 그 과정에 작은 실수라도 남았다면, 카이로스가 나를 가만 둘 리 없다. 최악의 경우 새장에 갇힐 수도 있겠지.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그럴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알카이드도 걱정이다.
[나]
이 밤중에 나랑 밖을 돌아다녀도 괜찮겠어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알카이드]
그렇긴 합니다만... 야심한 밤에 당신의 침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들기는 것보다는 낫겠죠. 이미 제 권한 밖의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는 문을 열고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알카이드]
괜찮을 겁니다. 가시죠.
-
알카이드는 빛을 굴절시기는 마법을 쓰면서 호위병들의 눈을 피했다. 도착한 곳은 야경 이 한눈에 들어오는 황궁 최고층 테라스였다.
[나]
와아, 예쁘다...
아름답고 장엄한 풍경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그리고 땅에는 황성의 등불들이 다채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너무도 멋진 야경에 한참이나 넋을 놓고 말았다.
[알카이드]
여긴 황궁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하늘과 별에 가장 가까운 장소죠.
알카이드는 주변을 살핀 뒤 물었다.
[알카이드]
원하신다면 더 높은 곳으로 갈 수도 있는데... 어떠십니까?
알카이드는 눈웃음을 지었다.
[알카이드]
...오늘만 보여드리는 겁니다.
부드럽게 속삭인 그는 내게서 몸을 돌리더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알카이드]
자아, 달콤한 꿈속으로 가보실까요.
알카이드가 마법진을 그리자 허공에 반딧불처럼 작은 별빛들이 떠올랐다. 속속 모여든 그 별빛들은 더 높은 하늘로 향한 빛의 계단을 이루었다. 그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알카이드]
가시죠.
알카이드의 손을 잡는 순간, 정말로 단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밤하늘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알카이드]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저를 믿으세요.
나는 조심스레 빛의 계단을 올랐다. 황궁도, 발아래의 야경도 모두 현실감 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은하수 위를 걷는 느낌이 이럴까. 황홀해져 눈이 감기던 그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알카이드]
조심!
나를 단단히 붙잡고 다정하게 부축한 알카이드는별의 계단을좀더 넓혀주었다.
[알카이드]
마음에 드세요?
[나]
그럼요! 이런 건 정말이지...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알카이드.
나를 생각해주는 알카이드의 마음이 와닿아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힘든 상황임에도 내색 없이 나를 지키고 돌봐준 것도 고마운데, 이런 아름다운 순간까지 만들어주다니. 이렇게 따스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알카이드는 돌아갈 때까지도 내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실로 달콤한 꿈을 꾸었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알카이드]
그럼, 편히 쉬십시오.
[나]
잠깐만요.
알카이드는 24시간 감시 임무를 맡고 있다. 내가 잠든 뒤에도 그는 쉬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알카이드]
내 방에 안락의자가 있어요. 피곤할 때면 들어와 거기 앉아서 쉬어도 돼요.
알카이드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알카이드]
당신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요.
그는 내 뺨을 어루만지려는 듯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손을 거두어버렸다. 그의 손끝이 내 귓불을 살짝 스치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알카이드]
누군가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묻거든...
[나]
알고 있어요. 비밀로 할게요.
[알카이드]
아니, 숨기지 말고 사실 그대로 대답하시면 됩니다.
뭐, 라고...?
[알카이드]
편안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