ろ_ 2024. 1. 2. 20:11

[나]
왜 이렇게 잠이 안 올까...
 
 어젯밤도 뜬눈으로 새웠으니 오늘은 지쳐서라도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긴. 이런 상황에 팔자좋게 푹 잘 수 있을 리가.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알카이드]
신녀님, 야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문 앞에 두겠습니다. 숙면을 돕는 허브티도 있으니 꼭 드세요. 
 
 잠이 절실했던 나는 다른 간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허브티만 마셨다. 향긋한 차를 마시니 긴장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웬걸. 한참이 지나도 전혀 효과가 없다. 
 ...아아, 안되겠어. 자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나는 방 안을 서성이다 문에 다가섰다. 이 너머에 알카이드가 있겠지...
 
[나]
알카이드. 거기 있어요? 
 
밤은 길고 잠도 오지 않으니, 차라리 그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얻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나]
잠이 안 와요. 허브티 때문인 것 같은데...
 
알카이드는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카이드]
죄송합니다 신녀님. 전에 차를 사용했을 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알카이드도 못 자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또 내 생각만 해주는구나...
 
[나]
그러니 책임지고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알카이드]
...네?
 
[나]
아, 혹시 무리한 부탁인가요? 
 
[알카이드]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지루하실까 걱정입니다. 
 
언제나 진지한 그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
괜찮다면, 어린 시절 이야기... 조금 더 들을 수 있을까요? 
 
그가 문에 등을 기대고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알카이드]
그러죠.
 
나는 문을 사이에 두고 그와 등을 맞대 앉았다. 

[알카이드]
낮에 말씀드린 대로, 셜린, 잭, 그리고 저는 빈민가에서 함께 자랐습니다. 셜린은 눈물이 많은 아이였죠. 밤만 되면 서럽게 우는 그 아이를 달래려고 밖에 나가 별의 움직임을 읽어주곤 했습니다. 잭은 그런 저를 보고 마법사 같다며 놀렸죠. 그런데, 서로 그런 소릴 자꾸 하고 듣다 보니 정말로 제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즈음, 돈을 내면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다는 소문을 접했습니다. 마법사만 되면 쉽게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기에, 우리 남매는 가진 것을 긁어모았죠. 잭도... 그동안 모아온 돈을 전부 제게 주었습니다. 성공하더라도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는 잭에게, 저는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굳게 약속했죠. 
 
[나]
그래서, 마법사를 만났나요? 
 
[알카이드]
화려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를 만나긴 했습니다. 주점에서요. 저는 술에 잔뜩 취한 그 마법사에게 실것 조롱당하고 맞고, 돈까지... 빼앗겼죠. "천부적인 재능? 너도 자격이 있다고?" 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의 전 재산이자 미래를 다 잃은 거예요. 제 무능함 탓에. 
 
[나]
그건 알카이드의 무능함 탓이 아니잖아요! 
 
모든 탓을 자신에게 돌리는 그의 말에 나는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나]
아무나 눈밭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건 아닌 걸요!
 
[알카이드]
그때의 저는 사실 마법이든 어느 쪽이든 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넋 놓고 당할 수밖에요. 
 
알카이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나는 입술을 깨문 재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알카이드]
저는... 도망쳤습니다. 모든 게 다 무서웠어요. 그중에서도 잭을 볼 자신이 없어서... 셜린의 손을 잡고 무작정 달음박질쳐 성 밖을 떠돌았죠.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그 많던 눈물조차 말라버린 셜린을 보니 정말.... 미칠 것 같더군요.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단 죄책감을 떨질 수가 없었습니다.
 내리는 눈 아래 주저앉아, 이 밤이 우리 남매가 이 세상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밤이 것을 직감했습니다. 주제넘은 욕심을 품은 벌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어 죽기 직전인 저와 설린 앞에 누군가가 멈춰 섰습니다.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보이는, 어린 제 눈에도 위엄이 느껴지는 마법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데려간 사람은 셜린이었죠. 제가 아니라. 

[알카이드]
오랫동안 찾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셜린을 내려다보던 그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셜린]
오빠! 도와줘, 오빠! 
 
[알카이드]
저는 셜린을 뺏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쫓아갔습니다. 굶은 지 오래였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발은 부르트고 숨은 턱까지 찼지만 죽을힘을 다했죠.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셜린을 데려간 분은 대마법사 예하셨습니다. 다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따라붙는 게 불쌍했던지, 예하께선 쓸데도 재능도 없는 저 같은 놈까지 거둬주셨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기대고 있던 문이 열려 중심을 잃는 바람에 알카이드는 방 안쪽으로 휘청 넘어왔다. 재빨리 손을 뒤로 뻗어 몸을 지탱한 알카이드는 곧바로 자세를 수습하고 일어났다.
 
[알카이드]
신녀님...?
 
[나]
알카이드, 다 지난 일이잖아요. 스스로를 무능하다느니 쓸데없다느니 자학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알카이드는 과거의 죄책감에 긴 세월 동안 짓눌려왔을 것이다. 천성이 작한 그에게는 더 가혹한 일이었겠지. 
 
[알카이드]
제게 재능이 없다는 건 자학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에요. 마법사의 재능은 '욕망'의 크기와 비례하죠. 강한 마법사는 끝없는 욕망의 소유자여야만 해요. 어린 시절의 전 그만큼 강한 욕망이 없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알카이드]
다 같이 좀 더 잘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죠. 제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 바람에 다 망쳐버렸지만. 셜린이 저보다 일찍 마법사가 된 건, 막다른 길에 몰렸기 때문입니다. 설린을 죽음 직전까지 밀어넣고 욕망을 품게 만든 건 결국... 저예요. 겁 많고 울보인 동생을 제가 보호해줘야 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약한 저는 셜린을 단 한 번도 지켜주지 못했어요. 
 
[나]
아니에요. 알카이드는 나약하지 않아요, 전혀. 잭과 셜린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던 거죠?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보다 동생과 친구를 위하고 그들을 위해 노력했잖아요.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알카이드는 나약하지 않아요. 당신은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에요. 
 
알카이드는 잔잔한 호수를 연상케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카이드]
신녀님이야말로... 따뜻한 분이십니다. 당신은 제가 지금껏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상냥하고 친절한 분이세요. 
 
알카이드의 눈동자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그새 조금 엷어졌다. 
 
[나]
어려운 이야기였을텐데... 해줘서 고마워요. 
 
[알카이드]
아닙니다. 저도...…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카이드]
...피곤해 보이십니다. 잠자리에 드셔야지요. 
 
[나]
알카이드와의 대화에 집중해서 그런가 봐요. 덕분에 이제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알카이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를 따라 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알카이드]
다행입니다, 신녀님. 
 
[나]
그 신녀님이란 호칭, 너무 어색하고 싫어요. 내 이름으로 불러줄 수는 없을까요? 
 
[알카이드]
그건 곤란합니다, 신녀님. 
 
나는 간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이게 내 이름이에요. 부탁이에요. 
 
한참이나 고민하던 알카이드는 그답게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카이드]
좋아요. 좋은 꿈 꾸세요.
 
매번 내게 져주기만 하네. 고마운 사람.
 
-
 
단잠을 잤다.

날이 밝자 나는 또다시 바람을 쐬고 싶다는 핑계로 궁을 나서 중앙광장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광장의 바닥엔 이미 거대하고 복잡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강림 의식을 위한 마법진이다.
 알카이드는 줄곧 내 곁에 머물렀다. 더없이 수상했을 텐데, 그는 무슨 일인지 결코 묻지 않았다. 오히려 순찰병이나 마법사가 내게 다가오려 하면, 은근슬쩍 막아주기까지 했다. 알카이드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게 절절히 느껴졌다. 아무리 임무라곤 해도, 이렇게 세심하게 관심을 쏟아주는 게 쉽지는 않을 덴데. 
 
-
 
 중앙광장을 다 돌아보니, 이번엔 얼음 나비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졌다. 얼음 나비는 제아무리 강한 마법사라 해도 절멸시키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것들이 생겨난 이유는, 그리고 완전히 뿌리 뽑을 방법은 뭘까.
 나는 광장에서 이어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눈 쌓인 돌바닥 측면에서 작은 구멍을 하나 발견했다. 하수도인가 보다. 구멍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비치는가 싶더니 정체 모를 것들이 날갯짓하며 빠져나왔다. 크기는 아주 작았지만, 분명히 얼음 나비였다. 알카이드는 주변의 위험 요소를 점검하느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 골목은 복잡한 구조물들에 가려 광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얼음 나비를 처리한다 해도 들킬 염려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