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로운 시작
나는 숱한 문들 중 하나를 선택해 과감히 열어젖혔다. 무수한 허상 너머, 이세계의 편린들이 보였다.

연회를 즐기고 있는 황제, 그늘에서 암약하는 대마법사, 눈보라 속에서 얼음 나비를 퇴치하느라 여넘이 없는 옅은 금발의 마법사까지.
알카이드... 내가 아는 그는 누군가에게 일부러 해를 끼질 인물이 결코 못 되었다. 말은 안 해도, 지금 그는 나보다 백 배는 더 참담할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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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익은 침대와 책상... 에르세르 황성의 황후 침전이다. 밤중인가 보다. 어두운 창가에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에르세르에 다시 온 것까진 좋은데, 상황이나 시기가 전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출입구로 다가갔다. 문을 열어보려던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나는 불쑥 나타난 사람과 부딪쳤다.
[나&알카이드]
아앗!
그는 당황한 얼굴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알카이드]
실례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허기지실듯해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알카이드는 복도의 카트에서 사과, 작은 케이크, 구운 양다리 등 여러 요리가 차려진 은제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다. 그 트레이를 보자 카이로스의 명으로 그가 나를 감시하기 시작한 때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늦지 않았구나. 아직 바로잡을 수 있어.
[나]
아아, 정말 다행이에요!
뜬금없는 내 반응에 알카이드는 다소 어리등절해했다.
[나]
마침 배가 고팠거든요. 고마워요, 알카이드.
그가 나를 위해 애써 준비해 온 식사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나]
알카이드, 혹시 나이프 한 벌 가져다줄 수 있어요?
[알카이드]
신녀 각하, 이곳에서는 이런 위험한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나]
안심해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함이 아니라 좀 잘라서 먹고싶어서요. 포크만으로 사과와 케이크를 먹기는 좀 그렇잖아요?
나는 식판에 있는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고, 알카이드는 잠시 고민했다.
[알카이드]
정 그러시다면...
알카이드가 다시 돌아왔을 때, 과일은 이미 네모 반듯하게 잘려 있었다. 케이크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고 양고기도 가지런히 세팅되어 매혹적인 향을 풍겼다. 나는 여분의 포크를 들고 그를 불렀다.
[나]
자, 앉아요. 음식이 너무 많아서 저 혼자서는 다 못먹겠어요.
알카이드는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내저 었다.
[알카이드]
저는 괜찮습니다, 신녀님.
[나]
오늘 제대로 식사를 못 했을 것 같아서 그래요. 어서 와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는지, 그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오늘은 알카이드의 동생 셜린이 '제물'로 희생당한 날인데. 알카이드의 창백한 안색과 지친 녹색 눈동자에는 심적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내게 상냥히 대해주었다. 겨우 이런 걸로 위로가 될 리 없겠지만, 그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나]
어서요, 알카이드.
내 간곡한 권유에 그는 겨우 자리에 앉았고, 우린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대화가 없어서인지, 그릇은 금방 비었다. 지난번엔 알카이드에게 그림 도구를 부탁했다가 로샤와 충돌했었지. 이번엔 조심해야겠다. 나는 식사 뒷정리 중인 알카이드에게로 다가갔다.
[나]
알카이드, 부탁이 하나 있어요. 로샤가 오는 것 같으면 내게 미리 알려줬으면 해요.
[알카이드]
...신녀 각하. 폐하를 감시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내 보초가 아니라 감시역이다. 게다가 그는 로샤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 내가 한 것은 부담스럽고도 무례한 부탁이었다.
[나]
아, 아니에요. 알카이드의 입장을 미처 생각 못 했네요. 미안해요.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알카이드는 내게 공손히 인사하곤 방을 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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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독특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번쩍 머릿속을 스쳤다. 알카이드가 보내는 신호일지도! 혹시 로샤가 오고 있는 건가?
나는 얼른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자는 척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가까위졌다. 로샤가 틀림없다. 그는 내 곁에 한참을 서 있더니 도로 방을 나갔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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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알카이드는 안쓰러울 정도로 지쳐 보였다.
[알카이드]
신녀님,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
알카이드, 잠깐만요.
나는 알카이드를 고통으로부터 구하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다시 에르세르에 왔다. 그러나 황궁 안은 감시가 삼엄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행동반경을 넓혀야만 한다. 내가 뭘 하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곰곰이 방법을 모색하던 중, 황실 별궁이 떠올랐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알카이드가 알아챌 때까지 계속해서.
[알카이드]
신녀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알카이드의 순수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알카이드]
몸이 안 좋으시면 황실 의원을 불러드릴까요?
나는 또 한번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나]
꼭 감옥에 갇힌 기분이에요. 이 안에서만 지낼 생각을 하니 밤새 잠도 안 오고, 너무 답답해서 숨도 못 쉬겠어요.
알카이드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내가 유도했던 그 한마디를 꺼냈다.
[알카이드]
잠시 바람이라도 쐬러 가시겠습니까?
[나]
좋죠! 황실 별장으로 가요!!
나는 마음이 급해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카이드]
신녀님, 그곳을 어떻게 아십니까?…아니, 잠시만요.
혹시 뭔가 눈치를 챘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알카이드]
아직 식사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몸부터 돌보셔야 합니다.
그런 건 아니었다. 다정한 알카이드는 여전히 내 걱정뿐이었다.
[나]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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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궁으로 가는 길, 마차가 눈 내리는 중앙광장을 지났다. 곧 빈민가가 나타날 것이다. 내가 얼음 나비를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곳.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빈민가 중심을 통과하던 중, 예상했던 대로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마부]
무슨 일이지?!
나는 알카이드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골목 안쪽에서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달려 나오고 있었다.
[도망치는 남자]
얼음 나비다! 어서 도망쳐!
사방은 아비규환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주변을 헤치고 나가 알카이드 곁에 다가섰다. 알카이드는 나를 보호하며 마법으로 얼음 나비를 퇴치했다. 모두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얼음 나비는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이때 기습이 들어온 것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예상대로, 골목의 음지에서 서늘한 빛이 번쩍였다.
[나]
알카이드, 조심해요!
나는 곧장 그림 소울을 소환해 공격을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