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집회소
이곳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 얼음이 술잔에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만 이따금 들려왔다. 집회소의 용병들은 바깥의 보초들처럼 질서정연해 보였고, 장비는 에덴의 다른 평범한 능력자들 것보다 더 고급스러웠다. 앞에 있는 바의 한가운데에는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그림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칠흑처럼 시꺼먼 망토를 두른 그는 한 손으로 술잔을 쥔 채, 술잔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루카스]
보스, 데려왔습니다.
아인이다 그는... 이곳의 지도자 같았다.
[아인]
이리 와, 앉아.
그가 내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의 앞에 술잔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보스가 직접 대접해 주다니, 그것만으로도 내게 얼마나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인이 건넨 술잔을 받아 향기를 맡아보았다.
[나]
테스트인가요? 도수가 어떻게 되죠?
아인이 꼼짝도 않고 가만히 날 쳐다보자, 루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루카스]
하하하. 보스, 건방진 꼬맹이죠? 이참에 본때를 보여줄까요?
[아인]
루카스.
아인이 루카스의 이름을 가법게 부르자, 루카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인은 뭔가를 파악하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하지만 끝내 아무말없이 내게 따라줬던 술잔을 집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 동작을 시작으로 주변이 순식간에 소란해지더니, 술을 권하거나 호탕하게 웃는 웃음소리, 고함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이기 시작했다.
이 집회소에는 모두 몇 명이나 있는 걸까? 십여명, 아니면 이삼십명..? 아무래도 보스가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아주 잠깐 질서정연한 모습을 유지했던 것 같다. 아인이 술잔을 들이킨 순간, 모종의 금지령이 해제된 듯했다. 아인이 날 항해 돌아섰다 모든 사람 중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아인]
자기소개 해봐.
아인은 온몸을 단단히 감싸는 의상을 걸치고 있었고, 망토에는 다양한 제어 장치와 금속 장치가 달려 있었다. 그가 나를 마주하며 바라보자, 그의 엄격함이 전해졌다.
[나]
뭘 소개하면 될까요?
[루카스]
보스는 네 능력을 보고 싶은 거야.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또 뭘 하고 싶은지를.
[나]
이건 제 이름이에요. 딱히 할 이야기는 없어요. 입단하려는 건 아니고, 정보가 필요해서 왔어요.
루카스는 손으로 머리를 짚더니, 낭패 섞인 표정을 지었다. 방 안에서 망토를 벗은 그는 밖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아인은 날 보며 미간을 슬쩍 구겼다.
[아인]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대를 데려온 건가?
[루카스]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루카스가 죄송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루카스와 붉은 머리 소녀는 더 괜찮은 숙소가 있으니 내게 합류하라고 했고, 나는 정보를 알아내고 싶다는 마음에 다소 성급하게 행동하고 말았다. 사과를 해야 할지, 지금 이곳을 떠나는 게 실례가 되는 걸지 고민할 새도 없이, 아인이 탁자를 가법게 두드렸다.
[아인]
선인장 주스 한잔 따라줘.
보스의 명령에 누군가 잽싸게 주스로 가득 찬 컵을 내 쪽으로 밀었다.
[아인]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사람이 같은 편이 되는 건 좀 곤란해. 레지스탕스는 함께 승리를 나눌 동료가 필요하니깐.
날 위해 다른 용병에게 주스를 주문하는 보스. 날 위한 배려가 확실했지만 그의 말 투는 여전히 냉랭했다. 루카스가 다가와 몇 마디 건네자, 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
그래, 알았다.
말을 마친 아인이 바에서 몸을 일으켰다. 떠나기 전, 아인은 루카스 옆에서 지시를 내리는 듯했다. 내가 유일하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아인]
...날 실망시키지 마라.
아인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집회소에서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루카스가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루카스]
우대 조건으로 대해주겠다고 했는데, 고작 주스? 이건 너무하잖아, 새싹아.
[나]
새싹? 그건 또 무슨 이름이죠?
[루카스]
사막에서 녹색 식물은 매우 귀하거든. 좋은 별명인데, 별로야?
처음 본 사람한테 별명을 지어주다니. '루카스'답다. 나는 문득 집회소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인은 자리를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뭘 하느라 바쁜 걸까... 그는 '레지스탕스'의 단장이다. 이 많은 사람을 에덴으로 들여보내고 집회소라는 지역을 자지했다니. 아무래도, 이 세상의 아인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겠다.
선인장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곤 이를 악물었다. 주스는 지독하게도 시었지만, 뱉어 내지 않고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계속해서 마시다 보니 특유의 감칠맛이 느껴져 제법 맛있었다. 루카스는 옆에서 그런 날 지켜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루카스, 같이 술을 못 마신다고 절 무시하는 건 아니겠죠? 주스의 신맛은 괜찮아요. 아까 꽤, 처음에 너무 많이 마셔서 조금 놀란 것뿐이니까.
루카스가 살며시 눈썹을 들어 올렸다.
[루카스]
...년 어떤 사람이지? 아까, 에덴을 찾는 사람은 두 부류라고 말했지? 갈 곳이 없어 쉴 곳을 찾는 사람, 그 리고 더 큰 야심과 욕망을 가진 사람.
[나]
레지스탕스 사람들은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루카스]
맞아, 우린 보스를 중심으로 뭉쳤어. 너도 '동료'가 되면 네 취미나 성향도 모두 자연스레 받아들여질 거야. 동료가 되지 못하면... 네 성향 같은 건 상관없어. 널 설득해보라던 보스의 지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실망을 안겨드린 게 아쉬울 뿐이지.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태도에서 진실성이 느껴졌다. 잠깐, 내가 지나친 게 있는 것 같은데? 보스가 날 설득해 보라고 했다고? 수상했다. 아인은 나와 몇 마디 채 나누지도 않았는데. 방금 전의 만남이 면접이었다면, 난 분명 탈락했을 거다.
[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여기 보스가 날 합류시기려고 했다는 건가요?
[루카스]
맞아. 널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거든. 그분 눈에 드는 사람은 오랫동안 없었는데...
[나]
레지스탕스의 2인자 씨.
[루카스]
왜 그래?
[나]
'마음에 들어 한다'는 말,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아요?
[루카스]
당연하지. 보스도 마찬가지고. 날 믿어, 보스의 속마음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거든.
[나]
하지만 난 루카스가 말한 첫 번째 부류의 사람에 가까워요. 피난 갈 곳을 찾는 사람이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반박하지 않고 내 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루카스]
상관없어. 어차피 '에덴'은 최강자의 의지대로 굴러가니까. 곧 있으면 4시... '안전 시간'이 끝나지.
루카스가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가리켰다.
[루카스]
에덴은 안전 시간일 때만 비로소 '낙원'이야. 가봐, 새싹아! 보스가 나더러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혼내겠지만 네가 한번 직접 확인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네. 바깥세상의 현실을 확인해보고, 네 의지로 돌아오도록 해.
[나]
돌아오라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니겠죠?
[루카스]
보스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한테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
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그럼 난 갈게요, 오늘 초대 고마웠어요. 선인장 주스도 잘 마셨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