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한 선배 ]
후배님! 전에 디자인 의뢰한 의상이 완성되었어!
학생회실에 있으니깐 보러와!
알겠습니다. 지금 갈게요!
휴대전화 화면 밖으로 시선을 옮기면, 희고 옅은 구름이 하늘 위에서 파도를 치고 있다. 찬바람이 불자, 나도 모르게 옷깃으로 목덜미를 가리게 된다. 올해도 트릭나이트가 다가온 건가.
매년 세인트 셀터 학원에서는 트릭 나이트라는 이벤트가 개최된다. 그래서 행사를 위해 개점 준비를 하거나, 퍼포먼스의 리허설이 진행되는지라 교내가 시끌시끌하다.
[정재한]
후배님~! 봐봐, 이거!
학생회 준비실로 들어온 재한선배는 마치 보물을 과시하듯 다섯 개의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안에 들어있던 건 디자인부터 옷감 선정, 바느질 확인까지 하며 내가 직접 만든 트릭 나이트용 의상이다.
[정재한]
우왓, 이게 완제품인가! 역시 후배님! 우리 학생회의 자랑이야!
[나]
그런, 부끄러워요.... 것보다 저, 학생회에 들어갔던 건가요?!
[정재한]
그런 세세한 건 신경쓰지 말라구. 어쨌든 보너스 학점은 기대해도 돼!
[나]
말해두겠습니다만, 학점 때문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절대 안 맡을 거니깐요.
이 다섯 벌을 만들기 위해 나는 한 달 동안이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몇 번이나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치만 완성품을 보니 그런 고생도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 의상도 장식도 전부 내가 만든 작품이니 당연하겠지만. 물론 프로 디자이너의 작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퀄리티지만, 지난 한 달 동안의 작업은 내게 큰 경험이 되어주었다.
[정재한]
맞다, 후배님, 미안한데 이 의상을 각각의 테마 부스쪽으로 전달해줄 수 있을까? 4개의 방은 거의 완성되었을테니깐.
[나]
네, 문제 없어요, 의상이 부스 컨셉에 제대로 어울리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정재한]
다행이다. 그럼 잘 부탁해! 나는 대본 연습이 있어서!
[나]
엣, 재한 선배도 연극에 나가는건가요? 확실히 부스담당자라면 대사를 외울 필요가 있죠...
이번 트릭나이트 이벤트로 진행되는 무대대본은 나도 조금 읽었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중2병같은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정재한]
나는 이벤트 MC를 해야하는데 진행자이니만큼 대사를 외우는게 제법 힘들어서.... 아, 참고로 후배님이 디자인한 의상은 아니지만, 나도 흡혈귀 의상을 입는다고.
[나]
학생회도 힘들겠네요... 서로 힘내봐요.
[정재한]
응!
재한선배는 가볍게 주먹을 치켜들고, 의욕에 찬 표정으로 떠나갔다. 책상 위에는 내가 디자인한 5벌의 의상이 놓여있다. 이 중 한 벌은 내 옷이겠지. 나머지 4벌은 각각의 테마 부스에 전달해야하니깐...
자, 그럼 의상을 전하러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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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종소리가 여섯 번 울리자 할로윈 컨셉으로 꾸며진 광장의 조명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학생들의 기대감과 함께, ’트릭 나이트‘가 드디어 막을 올린 것이다.
나도 어서 트릭광장으로 가야지. 광장에선 많은 가게들이 장난감이나 과자를 판매하고 있었다. 평소의 조용한 거리와 비교되는 대성황이다. 오가는 사람들 모두 할로윈 컨셉에 맞춰 코스프레를 하고 지나다니고 있었고, 과자를 손에 들고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오늘 밤 세인트셀터 학원 정문은 셀레인 섬의 전 주민에게 개방되어 모두가 올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섬의 주민들 누구나 이 기묘하고 신비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비교적 사람들이 없는 곳을 지나 테마부스로 이동하려 하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달빛 아래 으스스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예복을 입은 그의 얼굴은 가면으로 덮여있고, 등 뒤로 걸친 망토는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우아하고 신비한 등장... 일 터였다. 만약 그의 머리가 호박이 아니었다면.
[???]
안녕. 아가씨.
[나]
안녀... 응? 누구세요? 어째서 제 이름을 알고있는 거죠? 저를 아세요?
눈 앞의 인물은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기묘한 호박가면‘이라는 역할에 완전히 빠져있는 듯. 가면 속에서 훗, 하고 희미한 웃음이 들려온다.
[???]
제과점에선 주인인 검은 고양이가 손님을 기다리고, 몬스터 가게의 마술사는 장난꾸러기 드래곤에게 시달리고 있죠. 달 위의 별들은 순식간에 밤을 지나 땅 위로 떨어지고, 높은 성 속 늑대인간의 저주는 아직 풀리지 않았답니다... 오늘 밤, 당신은 이런저런 장소에 향하겠조, 그러나, 어디에 가던지 절대 진실을 파헤치려 하면 안된답니다. 이 덧없는 환상이 끝나버릴지도 모르거든요.
[나]
고마워요, 하지만....
[???]
그럼, 당신과 또 재회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만약 이것이 평범한 날에 일어난 일이라면, 나는 경각심을 가졌겠지만, 그의 말대로 오늘 밤 만큼은 세계가 화려한 환상으로 가득차있다.
누구를 만나던, 뭐가 들려오든 절대 신기해해서는 안돼.
그도 이 환상 속 사람이니깐.
나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이별을 고하며, 테마부스로 향했다.